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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그리고 소설

[단편소설] 구두 (1997 년작)

source: iStock

 

구두

96. 송윤희

"왜 맨날 바깥쪽이 빨리 닳는 거야?

집을 나서려고 현관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아내는 또 아침부터 핀잔을 준다. 1달전에도 아내는 똑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검정색 소가죽 구두는 반짝반짝 윤이 난다. 발을 들어 뒤축을 보았더니 역시나 그 때처럼 바깥쪽 굽이 닳아지고 보기 싫은 고무 찌꺼기도 붙어 있었다. 나는 다른 구두로 갈아 신으려고 신발장 문을 열었다.

“에이, 회사 늦겠다. 얼른 가.”

아내가 등을 밀치는 바람에 나는 못 이겨 나왔고 약간은 주춤해진 기분으로 지하철을 탔다. 북 적이는 전동차 안으로 몸을 쑤셔 넣고 목을 힘겹게 위쪽으로 뺐다. 항상 월요일, 이 시간 대면 출 큰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늘은 유난히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에서 내릴 때 사람에 치여 서류봉투 하나를 떨어뜨린 사실을 몰랐다. 안 그래도 정신이 구두 뒤축에 쏠린 터라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이었다. 서류를 잃어버렸던 사실은 회사 정문을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김과장이 내게 말을 건넨 뒤였다.

“좋은 아침. 어제 프로젝트는 마친 거야?

"오케이. 그 일로 어제 밤 샜지."

문이 열리고 나와 김과장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와 그는 같은 15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13층에서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자 엘리베이터 안에는 나와 그만 남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김과장의 구두를 보았다. 15층에서 문이 열리고 그가 앞서 내릴 때까지도 나는 그의 구두에 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구두는 윤이 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뒤축이 나처럼 만신창이 가 되어 있진 않았다. 그 때까지도 나는 서류가 내 손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남은 건 승진뿐 이군.

김과장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야유가 섞인 말을 했다. 지난 해에 같은 부서에 있다가 총무과 로 자리를 옮긴 그는 내가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는 친구였다. 대학동기인 그는 일처리에 능하 고 수완이 좋아 초고속 승진을 해서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친구였다. 놀랍게도 우리는 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김정호였다.

재경팀 문을 열고 자리에 앉고나서 야 나는 서류의 실종에 대해 눈치를 챘다. 눈 앞이 캄캄해 졌다. 입사 처음으로 큰 임무를 완성하고 내심 승진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중 요한 서류가 없어진 것이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히 회사를 빠져나와 지하철 입구에 도착했지만 별 뾰족한 도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속이 답답해져서 못 참을 지 경이었다. 회사로 다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답답한 속으로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물 었다. 그 때였다.

“굽 갈아야 겠어.'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50대를 훌쩍 넘어선 노인은 이마에 쪼글한 주름을 쫙 펴면서 미소를 지었다. 허름한 재색 잠바를 입은 노인은 까만 손가락에 슬리퍼를 걸고 내게 내밀었다. 이 슬리퍼를 신고 내 구두를 달라는 투였다. 나는 아무 말없이 구두를 벗어 주고 슬리퍼를 신었다. 그리고 노 인은 구두를 들고 옥상문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회사에서 구두를 닦는 노인임에 틀림없었 는데 그의 자세한 얼굴을 오늘 처음 보았다. 평소에는 그냥 스쳐 지나갔던 모습이 오늘 보니 낯이 많이 익은 모습이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친구와 충주중앙시장올 통과하여 걷고 있었나 날 씨가 맑아 집에 들렀다가 나와서 야구를 하자고 친구를 설득하던 참이었다. 커다란 책가방이 무거워서 나는 몇 번씩이나 가방을 다져 배면서 친구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밀린 숙제가 있었지만 5학년인 나는 야구가 더 좋았다. 외야수로 실력이 좋은 이 친구를 열심히 꼬시고 있었다. 그 때였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진수야"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친구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계속 걷고 있었다. 일찌감치 서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나 허름한 회색 잠바를 걸친 아버지는 새까만 손에 구두를 들고 있었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으나 나는 모른척하고 친구와 계속 걸었다. 이윽고 친구의 집에 도착하고 그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아까 아버지를 보았던 시장으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둥이 약간 굽은 채로 서 있는 아비지에게서 기름냄새가 났다. 마른 편의 아버지는 구두를 닦아서 돈을 벌었는데 자리를 옮겨 다니며 일을 하기 때문에 어디서 아버지를 만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만난 것이다.

아까 부르는 소리 못 들었니?"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마 친구에게 창피한 마음이 들어 모른 척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시장 끝에서 과일을 파는 리어카로 나를 데리 고 갔다. 수북이 쌓여 있는 과일이 먹음직스러웠다. 평소에는 비싸서 먹지 못하는 바나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파인애플이 있었다. 그런 과일은 친구의 생일잔치나 특별한 날에만 먹는 과일이었다. 평소에 어머니에게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집안 형편이 나아지면 사주겠단 변명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 아래 쪽에는 우리집에도 있는 사과가 있었다.

뭐 먹고 싶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사과만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과일장수에게 바나나를 싸달라 고 했다. 그리고 바나나가 든 까만 봉지와 이백원을 내 손에 쥐여주면서 집에 가라고 했다. 아무 표정 없는 아버지는 그렇게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얼마 있다가 노인은 새 굽으로 같은 구두를 들고 올라왔다. 나는 구두를 갈아 신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자리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집으로 전화를 넣으니 아내가 받았다.

아무 일 없지? . 동성이 집에 왔어? 그냥 걸었어. 아니, 일찍 들어갈게."

아직 유치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동성이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와 유난히 친한 그 녀석은 곧 잘 할아버지의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녔다. 그래서 매년 여름휴가때 충주에 다녀오곤 했었다. 그 러나 대학을 서울로 올 때까지 고향인 충주에서 지낸 나는 요즘은 바쁘단 핑계로 내려가는 일이 뜸해졌다.

그날 저녁엔 아내와 약속했듯이 회식 자리를 뿌리치고 집에 일찍 들어왔다. 사실 기분이 영 가라앉아 있어서 술자리를 즐길 수가 없었다. 아내는 반가운 듯이 가방을 받자마자 구두를 살폈다.

  ? 굽 갈았네? 잘 했어. 근데 당신 구두는 왜 그렇게 굽이 빨리 닳아? 구두 값보다 굽 값이 더 들겠어. 아버님이 서울에 계셨다면 좋았을 걸.”

  아버지가 내 굽이나 갈라고 사는 줄 알아?”

  나는 그만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항상 아버지 직업에 콤플렉스를 느끼며 사는 나에게 아내가 그런 소리를 했으니 나도 모르게 고함을 치게 되었다. 아내도 그런 내 기분을 알겠다는 듯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아내는 뭐가 미안한지 모를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가 친구들에게 구두장이로 보여지는 게 싫었다. 아니, 창피하고 아이들이 그것을 알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좁은 충주시내를 친구들과 다니다 아버지를 만날까 두려워했었다. 그리고 행여 아버지와 마주쳤을 때는 한 번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섭섭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같이 살자고 해도 어머니도 없는 충주에 남아 구두를 만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그렇게 늙어서도 고생하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아빠, 오늘 유치원에서 내가 그린 그림이야.”

식탁에서 밥을 먹다 말고 동성이가 방에 가서 스케치북을 가져와 보여줬다. 커다란 구두가 그려져 있었다. 심기가 불편한 나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밥을 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칭찬했을 터인데, 시큰둥한 나를 보고 일곱 살 박이 아들 녀석은 풀이 죽었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들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왜 애한테 그래…”

아내의 핀잔에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거실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잃어버린 서류 생각 때문에 머릿속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못 내도 상관은 없었지만, 만약이라도 이번 건이 걸리기만 한다면 승진은 맡아둔 것이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3일 밤을  꼬박 새서 완성한 것이어서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어 가슴이 씁쓸했다. 그만큼 공을 들였으면 한 번 심사에라도 걸쳐봐야 직성이 풀릴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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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장이 되어버린 프로젝트지만, 아내도 그동안 나를 지켜보면서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다음 날 회사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를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서류를 지하철에서 습득해 가지고 있다는 여자였다. 겉봉투에 적힌 회사 번호로 연락을 한 것이었다. 어제는 바쁜 일이 있어서 차마 회사까지 찾아올 수가 없었더란다. 그녀는 서류가 중요해 보였는데 바로 전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회사로 직접 찾아오겠다고 했다.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고 하니, 한사코 말리자 이쪽으로 올 일이 있어 가는 길에 잠시 들르겠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사내 지하 커피숍에서 첫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탁자에 놓인 노란 서류봉투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진수입니다."

그녀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전화 드렸던 사람이에요. 이렇게 늦게 찾아와서 죄송하네요. 급하신 서류 같아 서요. 어제는 아버님이 입원한 병원에 가는 길이었거든요. 갑자기 입원하시는 바람에 연락드릴 경황이 없었네요. 늦어서 폐가 되지는 않았나요?”

깍듯하고 예의 바르게 말하는 이 여자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어투가 낯이 익었다.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된 건 그녀의 손목을 보고나서였다. 손목에 그어진 흐릿한 상처. 그렇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 학교에서 있었던 자살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아침에 간신히 지각을 면하고 교실에 들어간 나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놀랐다. 왜냐하면 아침 종례 전이라 조용해야 할 교실은 시끌벅적 삼삼오오로 짝을 지은 아이들로 붐볐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나는 책가방을 열고 책 정리를 하며 짝에게 물었다. 반장인 짝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옆 반 여자애가 화장실에서 자살하려고 했다. 칼로 손목을 그었는데 애들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실려갔네.”

그 후 며칠 동안 그 아이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했고 다시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복도를 지나가면 아이들이 수군거렸지만 그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전부터 유명한 아이였다. 아버지가 뭘 하는지는 몰라도 엄청난 부자라는 것은 매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 세워진 외제차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아이가 외제차에 올라타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에 부럽기도 했다. 매일 바뀌는 예쁜 옷을 입은 그 아이는 얼굴도 참 예뻤다. 긴 생머리를 나풀거리는 그 아이의 이름은 혜진이었다. 한창 그 아이가 아이들의 화젯거리가 되었을 때 주어들은 이름이었다. 5월 말 까지도 그 아이는 그냥 나에게 있어 옆 반 여자아이,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부잣집 아이일 뿐이었다.

5 23일이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같이 김치국에 밥을 말고 학교에 갔다. 가족들은 아무도 내 생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하러 갔고, 고등학교를 다니는 형은 집을 나간 지 몇 달이 지나도록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학교에 가자 뜻밖에도 오늘은 내 생일인 동시에 내 짝인 반장의 생일이란 것을 알았다. 많은 아이들이 초대되었는데 대부분 반장과 잘 어울리던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물론 반에서 줄곧 일등만 하는 김정호도 있었다. 나는 그저 반장의 짝이란 이유 때문에 초대된 것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반장의 생일잔치에 갔다. 친구들과 교문 앞에서 만나 같이 선물을 사고 반장네 집으로 갔다. 으리으리한 대문 앞에서 모두 탄성을 질렀다.

우와! 이게 집이야? 멋지다!”

같은 반 친구의 말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현관이 열리고 반장의 어머니가 나왔다. 고운 얼굴에 화장도 예쁘게 한 반장의 어머니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넓은 정원을 지나 현관에 들어서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 속으로 들어와 침을 삼키게 했다. 반장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그는 까만색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어 아주 멋있어 보였다. 머리 위에는 황금색 모자를 쓰고 있어서 마치 왕자와 같았다. 안내를 받으며 10명의 아이들은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 앉았다. 케잌이 놓인 자리 앞에 반장이 어머니와 함께 앉았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치고 촛불을 끄고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을 풀어보고……

나는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반장의 생일잔치처럼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 생일을 축하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다고 축하해달라고 애들에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같은 날에 생일을 맞은 반장과 비교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집도 부자고 공부도 잘하는 반장이 미웠다. 서러운 생각이 들어 다음날 청소 시간에 나는 학교 뒤 운동장으로 갔다. 운동장 뒤편에는 조그만 언덕이 있었는데, 언덕 중간쯤에 벤치가 몇 개 놓여 있어 앉아서 나무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화창한 날씨에 여기에 앉아 있으면 정말 부러울 것이 없었다. 햇빛이 강했지만 나무 그늘이 진 벤치에 누워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곳은 내가 심심할 때나 기분이 상했을 때 종종 오는 곳이다. 5월이라 장미가 한창이어서 향긋한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혼자 누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누구 생일이야?”

왠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그 아이였다. 자살 소동으로 화젯거리가 된 아이 말이다. 분홍색 원피스에 하얀 리본으로 허리를 장식한 그 아이는 천사같이 예뻤다. 하얀 피부를 가진 그 애는 눈이 참 컸다.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아롱아롱 올라올 것만 같았고, 반짝거리는 입술은 뾰루퉁했으나 아주 귀여웠다. 아마도 그 애를 보면서 귀엽다는 느낌에 대해 깨달은 것 같다. 사뿐하게 내 앞으로 걸어왔다.

누구 생일이냐니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너 생일 맞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그 애는 더욱 재미있다는 듯이 놀려 댔다.

생일인데 혼자 뭐 하는 거야? 친구들이 축하 안 해줘?”

“응. 아무도 내 생일인 줄 몰라. 사실 어제 생일이었는데 집에서도 몰랐어.”

“그래? 안됐다. 너 이름모야? 난 혜진이. 아참, 너 정호랑 같은 반, 3반이지? 몇 번 봤어.”

역시 공부 잘하고 잘 생긴 놈은 여자애들이 다 좋아하나 보다. 나보다 정호를 먼저 알고 있어 자존심이 상한 나는 불쑥 이런 말을 하고 말았다.

나 사실 정호보다 공부 더 잘해.”

이 말을 하고 나서 정말 후회했다. 정호가 전교에서 줄곧 1, 2등을 하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데, 이런 말을 내뱉아버린 것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정호는 혜진이의 사촌이었다. 여하튼 나는 이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성적이 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합격이야!” 

S대에 붙은 것이다. 제일 기쁜 사람은 혜진이었다. 혜진, 정호, , 우리 셋은 나란히 합격했다. 등록금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학업을 포기할 생각도 몇 번 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혜진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포기하지 마. 돈 따위에 굴복하지 마. 등록금만 어떻게 해보고 나머지는 장학금 타. 정 안 되면 우리 둘이 아르바이트라도 해보자, ?” 

혜진은 힘주어 말했다. 아직은 19, 젊은 나이였다. 뭐든지 하고자 하면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의 말에 용기를 얻어 등록을 했다. 갑작스러운 등록금 때문에 생전 처음 도움 없이 살아온 아버지는 빚을 냈다. 부모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에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시간은 공부하기에도 빠듯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학기부터 나는 장학금을 탈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구두를 닦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는 꼬박꼬박 서울로 하숙비와 용돈을 보내왔다. 나중 에야 알았지만 그 돈은 아버지가 구두를 닦으며 번 돈으로 사두었던 땅을 조금씩 팔아서 마련한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해라. 이 애비가 못 배운 것까지 니가 다 배워라. 애비는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 

오랜만에 충주로 전화를 넣은 나는 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그만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평소에 말이 없이 무뚝뚝한 아버지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다.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돈 한 번 못 써 본 아버지. 남의 집 도배를 해주며 밤마다 허리가 아프다고 넋두리하시던 어머니. 고생하는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학이란 곳은 별별 애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나는 82학번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그리고 82학번, 신입생들은 선배 들과의 술자리에 치여 살았다. 술에 찌들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들의 고민은 더 커졌고 공허함을 느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같은 사치를 느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뿐인 동기들에게 정을 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기적이었으며 감사한 마음이란 것을 몰랐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으며 나는 그들과의 괴뢰감으로 상당히 많이 고민했다. 그러나 결론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각자의 삶에 미터기를 꺾으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종착역이 달랐으며 지불해야 할 요금도 달랐다. 그런 허한 마음으로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혜진이 떠났다.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내 삶의 목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내 자아의 궁극점이었다. 그런 그녀가 떠난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인사는 전철문을 사이에 두고 서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 가는 나에게 가볍게 손을 흔드는 그녀가 내 곁을 떠나버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나리란 생각은 더더욱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실례하지만 그만 일어나봐야 겠네요. 병원에 가봐야 하거든요.”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고 일어나려 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대접할 게 없네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언제 저녁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중요한 서류를 찾아 주셔서 꼭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네요. 그렇지 않다면 이 서류의 가치가 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나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더니 내 연락처를 받고 다시 연락하겠노라 했다.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문을 나서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가벼운 흥분감에 젖어 있었다. 이렇게 우연히도 그녀를 보게 되다니. 그녀가 만약 서류의 주인이 15년 전의 이진수라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총무과에 서류를 접수하고 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내 눈앞에 있지 않았던가.

총무과를 나서며 김정호와 마주쳤다.

접수했나보군. 잘 될 거야.”

그는 항상 이렇게 의례적이었다. 나는 그의 지나치게 깍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잠자코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혜진이가 생각나서 그에게 물었다.

“혹시 혜진이 소식 알아?”

“흠. 혜진이가 귀국한 건 어떻게 아는지. 곧 외삼촌께서 돌아가실 거래. 그래서 들아왔다더군.”

마음 고생이 심할 그녀를 생각하니 안쓰러웠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호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나에게 그녀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릴 적부터 나와 그녀가 어울리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더욱 그럴 것이 나는 이미 기혼자이기도 했다. 또한 혜진을 알고 있는 아내도 이 사실을 알면 좋은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집에 오면서 내내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집에 들어와서도 내내 그녀의 얼굴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너무도 소중했던 존재였기에 집에 와서도 그녀를 생각하는 내 자신이 아내에게 미안했다. 아내도 이상한 기운을 눈치챘는지 자꾸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프로젝트는 잘 되고 있는 거야? 발표 언제래?”

“어, 다음 달 1.”

아내는 저녁을 차려주고 아들 녀석과 놀이터에 갔다. 그리고 5분쯤 지난 후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기 충주다. 별 일 없냐아.”

아버지였다. 다음 주에 서울에 올라오겠다는 전화였다. 계절이 바뀌어 당신 아들에게 새 구두가 필요할 것 같아 한 켤레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어두운 신발장에는 아버지가 만든 구두가 수십 켤레나 쌓여 있었지만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한평생 아들에게 베푸는 낙으로 살아온 아버지에게는 그 사랑을 받을 줄 아는 것이 효도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받는 것에만 익숙한 나는 무언가를 주고 싶어도 어떻게 줘야 할지를 몰랐다.

그렇다. 나는 혜진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자주 고민했었다.

오늘은 혜진이의 생일이었다. 그녀는 새침한 입술을 오므리며 방과 후에 교문 앞에서 보자고 했다. 그날, 난생 처음으로 나는 외제차를 타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운전사가 건네 준 과자를 먹으며, 그 중 하나를 혜진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 바나나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자 나의 손을 이끌고 거실을 지나 2층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방문을 열자 꽃내음이 확 얼굴 위로 덮쳤다. 방 안 곳곳에 여러 종류의 꽃 화병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방을 둘러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테라스, 테라스 옆에 놓인 목조 피아노, 수많은 책이 쌓여 있는 책장, 책상, 그 위에 걸린 그녀의 유치원 졸업사진,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그리고 내가 너무도 갖고 싶어했던 전축도 있었다.

“오늘 나랑 재미있게 놀자.”

우리는 테라스로 나가서 하얀 철제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케잌와 과자가 있었다. 촛불을 켜고 나는 그녀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가방에서 헐겁게 싼 신문지 뭉치를건네주었다. 아버지에게 졸라서 만든 그녀의 구두였다.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까 고민을 했으나, 그녀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살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구두였다. 분홍색 리본이 달린 분홍색 신발.

“이런 선물 처음이야. 정말 선물은 처음 받아봤어. …… 우리 아빤 돈으로 주거든.”

그녀는 너무나 환하게 웃었다. 조그만 두 손에 구두를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분홍색 구두에 눈물이 떨어지고 나는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얼른 방으로 가서 휴지를 가져다주었다.

“우리 엄마가 살아있으면...... 그럼 말이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나는 가슴에서 무언가 올라왔다. 가슴에서 응어리져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내가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외롭게 하는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말이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는 호통을 쳤다.

“이노므 자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싸돌아다녀?“

나는 줄곧 우수한 성적이었고 우등상장을 받아왔지만, 어머니는 단 한 번도 흡족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니, 내가 잘 할수록 더더욱 못마땅해했다. 어머니가 유난히 좋아했던 형이 집을 나간 후로 항상 그랬다.

“아니, 지 형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데 넌 잘났다고 떠들어대니 원.”

내가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을라치면 어머니가 나서서 이렇게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아버지와 함께 동네 놀이터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잠깐 있어봐라.”

가게로 들어간 아버지는 사탕봉지를 들고 나왔다. 나에게 봉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사탕봉지를 받아 주머니 양쪽에 사탕 몇 개를 넣었다. 혜진이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애 갖다 주려고 그러냐?”

“예.”

“구두는 잘 맞더냐?”

“예.”

아직 아버지에게 고맙단 말도 하지 못했다. 차마 입에서 말이 안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항상 나를 보고 고개만 끄덕끄덕한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요즘 아버지의 얼굴이 더욱 헬쓱해진 것 같았다. 아버지의 까무잡잡한 피부에 히끗히끗 버짐이 피어올랐고 손바닥엔 굳은살이 배어 있었다. 내 손바닥을 펴 보았지만 굳은살 따위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손바닥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갖고 싶은 거 없냐?”

, 로봇이 가지고 싶어요.’ 하마터면 입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텔레비전에서 한창 유행하는, 반 친구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로봇을 사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제 혜진이가 인형을 갖고 싶다고 한 말이 생각나 꾹 참았다.

“인형이요.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는 인형을 사달라는 내 속마음을 알겠 다는 듯이 털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는 꼬깃한 지폐 한 장을 엄마 몰래 내 바 지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 가는 길에 인형가게에 들어가 혜진이에게 줄 인형을 골랐다. 나는 그 때까지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주는 일이 이렇게 뿌듯하고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그녀에게 온 세상 전부를 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는 힘이 없었다. 그저 얼른 커서 그 녀에게 좋은 것을 다 해주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다. 아니,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해줄만한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82년에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97,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회사에 출근하고 나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까 아침에 아내에게 오늘 아버지가 올라온다는 이야기를 깜빡 잊고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 난데 오늘 아버지 올라오실 테니까 저녁 준비 좀 해둬. 아참, 나 프로젝트 성공했어.”

“정말? 어머, 당신 축하해! 아참 그리고 당신한테 소포 왔더라. 회사에서. 하여간 오늘 저녁은 의미 있는 저녁이겠네? 아버지도 오시고 말이야.”

“소포 올 일이 없는데. 알았어. 오늘 일찍 들어갈게.”

나는 퇴근 시간까지 책상에 앉아 내내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혜진의 귀국, 아버지의 방문, 그리고 의문의 소포에 대해서.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사 가지고 왔다. 아파트 문 밖에서부터 동성이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고, 집에 들어가자 고기 냄새가 확 달려들어 식욕을 돋구었다.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동성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의 깊은 주름에 패인 웃음을 보자 금새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있는 나를 보자 아들 녀석이 달려왔다.

“아빠! 할아버지 왔어! 아빠 구두랑 내 꺼랑 엄마 꺼 구두도 있어!”

동성이는 재빨리 거실에 놓인 가방을 열어 구두를 꺼냈다. 신문에 싸인 구두를 모두 풀어헤친 후, 제일 큰 치수의 구두를 들고 내게로 왔다. 분명 아까 가방에서 꺼냈을 신발들을 아버지는 곱게 싸서 다시 가방에 넣었나 보다. 당신 손으로 내게 구두를 직접 전해주려고 말이다. 그런 아버지 속도 모르고 동성이는 구두를 들고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얼렁 신어봐. 할아버지가 아빠 주려고 만들었대.”

나는 구두를 한참 바라보다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침실로 갔다. 침대 위에는 소포가 놓여 있었다. 노란색 종이로 싼 네모난 상자였다. 보낸 사람의 주소에는 회사 주소가 적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뜯어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를 열고 나서 나는 그만 숨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과거를 거스르고 있었다.

그것은 분홍색 구두였다. 세월이 흘러 낡고 색이 바랬긴 했지만, 분명 그것은 내가 혜진이의 열한 번째 생일에 선물로 주었던 구두였다. 구두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꺼내자, 신발 밑에는 편지가 있었다.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분명 너도 그 날, 알았을 거야. 나라는 것을. 그렇지만 우린 서로 모르는 척했지. 아니, 너는 적어도 몰랐을 지 몰라. 지하철에서 발견한 서류봉투에서 네 이름을 보는 순간, 너무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었지. 꼭 한 번 네 얼굴을 보고 싶었어.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래서 회사로 찾아갔었던 거고. 그 후에 집으로 연락해 네 아내가 전화를 받았을 때, 물론 결혼했을 줄 알았지만, 다시는 네 얼굴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 아마도 이 편지가 내 마지막 연락일 거야. 내가 너를 잊지 못했듯이 너도 나를 못 잊고 있을 거란 생각에. …… 모르겠다. 왜 이렇게 복잡한 건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 동안 연락 없었던 것 미안해. 말도 없이 떠난 날 많이 미워했을 거야. 하지만 그때는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는 걸 알아줘. 무작정 아버지가 널 잊고 미국으로 가라고 했을 때 얼마나 좌절했는지 몰라. 그렇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마저 잃고 싶진 않았거든. 글쎄…… 어머니를 잃고 나서 얼마나 방황했었는지. 생각나? 나 어렸을 때 자살 소동 벌였던거. 이제 모두 지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는 너무 가슴이 아퍼. 이제 아버지도 내 곁을 떠나려 하고. 어떻게 마음을 추스려야 할지 모르겠어. 진수야, 정말 내가 먼저 널 떠나진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사랑했어. 정말 세상에서 너밖에 없었는데. 네가 선물했던 분홍색 구두. 긴 세월 동안 나에게 힘이 되었던 소중한 보물이야. 그 선물이 나에게 힘이 되었듯, 앞으로 너에게 작은 힘이 되길 바라면서 보낸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추억의 단편마저 없애고 싶었나 보다. 가슴 언저리에서 밀려오는 아득한 향수와 애상에 젖어, 나는 구두를 가슴에 안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분홍색 구두를 볼 때마다 혜진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떠오를 것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이 분홍색 구두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녀는 아마도 아름다운 추억들로 인해 흐뭇한 미소를 짓기보다는, 못 이룬 사랑 때문에 쓰라린 마음으로 우는 날이 많았을 것이다.

여보, 밥 먹어요.”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나는 구두를 상자에 넣어 책상 서랍에 넣었다. 방문을 꼭 닫고 나와 식탁에 앉았다. 아들 녀석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제 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들고 와 아버지 앞에서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더니, 예전에 나에게 보여줬던 구두 그림을 펼쳤다.

할아버지, 이것 봐! 이게 뭐냐하면,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그리라고 했는데,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이야. 난 할아버지가 만든 구두가 제일 좋거든. 유치원 애들이 내 구두 보고 막 부러워하고 그래. 난 구두 잘 만드는 할아버지가 좋아.”

오랜만에 아버지와 저녁을 먹는 식탁에서 나는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울렁였다.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무언가가 막혀 있는 듯 답답했었는데, 바로 지금 나는 마음속이 아주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