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불안
- 숙제 없이는 못살아 -
2025-07-09
송윤희
나는 중학교 2학년쯤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나안시력이 0.6이었는데, 해가 지날수록 시력이 나빠져 지금은 0.2 정도다. 안경이 없으면 5미터 밖의 사람 얼굴을 분간하기 어렵고, 2미터 안으로 들어와야 겨우 얼굴을 알아본다.
어느 날 영화관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는데, 안경을 안 가져온 걸 그제야 알았다. 순간, ‘엇! 집에 갔다 올까? 말까?’ 타임스퀘어에서 집까지 왕복 30분쯤 걸릴 텐데(걸어서), 영화의 절반은 놓치게 될 것 같아 그냥 자리에 앉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를 잘 봤다. 어차피 자막은 안 봐도 되니까, 영어 듣기 연습도 될 겸 괜찮았다. 그렇게 나는 안경 없이 ‘28년 후’를 봤다.
집 밖에 나가기 전에 꼭 챙기는 것들이 있다. 신용카드, 핸드폰, 안경. 좀 더 신경 쓰면 핸드크림, 휴지, 치실 정도도 챙긴다.
한 번은 친구와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 전철역까지 부랴부랴 갔는데, 신용카드를 안 가져온 걸 알았다. 교통카드가 없는 것이다. 급히 핸드폰에 티머니 앱을 깔고 정보를 입력하다 보니 15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결국 아이폰은 해당 기능이 지원되지 않았고, 나는 집에 다시 다녀와야 했다. 15분이 더 흘렀다. 다행히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왔던 덕에 늦지는 않았다. 다만, 내 친구 효숙이는 여느 때처럼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고객인 병원을 방문하기 위해 차 키와 이것저것을 챙겨 시동을 걸고 한참을 달린 후에야 핸드폰이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방문할 병원은 목적지인 주소에 있었고 고객도 항상 내가 방문하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집에 돌아와 보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는 것.
외출 전에 늘 물건을 확인하는 이유는, 막상 밖에 나가서 그것들이 없다는 걸 깨닫는 불상사를 마주하기 싫은 불안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일종의 숙제일까? 안경을 챙기는 일은 숙제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없으면 불편한 것. 불편을 감수할 마음을 준비하는 순간, 안경 없는 불편함도 어느새 사라진다.
나는 2001년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석 달 전, 백수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면접을 봐야 한다. 중간에 몇 번 일을 쉬긴 했지만, 실업급여를 받는 건 10년 만에 두 번째다. 10년 전엔 하루 일당이 4만 원이었는데, 이제는 6만 6천 원이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다는 뜻이다. 내 최근 월급은 10년 전의 두 배가 되었지만, 실업급여는 고작 50%만 올랐다.
어쨌든 실업급여만으로는 한 달을 버티기 어렵다. 결국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꼭 필요한 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회사다. 나 같은 대충주의자—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때그때 기분이 수시로 바뀌는 사람—는 회사 대표보다는 누군가 아래에서 일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런데 나는 또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다. 경력의 정점인 40대 초중반을 지나오면서, 나를 부르는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조금씩 자존감이 깎이고 있는 중이다.
지금 면접은 나에게 숙제 같은 존재다. 반드시 해야 할 일. 미리 회사를 조사하고, 예상 질문과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성격이다. 마냥 노는 백수는 내 체질이 아니다. 세 달 동안 집에 머물렀지만 단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면접도 몇 번 봤지만, 자신 없는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가 많아서인지 아직도 구직 중이다. 면접이 끝날 때까지 불안은 계속된다. 열심히 준비한 면접도 막상 20분 사이에 우물쭈물하다 기회를 날리면, 그 후유증이 며칠은 간다. 아, 아쉽다. 그 회사는 연차도 자유롭고, 재택근무도 자유로운 정말 좋은 회사였는데.
내일은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러 서울역에 간다. 평소엔 11시에 만나 점심 먹고 차 마시며 3시쯤 헤어지지만, 내일은 4시에 면접이 있어 2시 반에는 돌아와야 한다. 게다가 이번 면접은 나에게 생소한 분야라서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준비해야 하는데, 준비할 시간이 없다. 오늘 오후 갑자기 면접 일정 안내 문자가 왔다.
7월 5일에 자격증 시험도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내일까지 제출마감인 PT면접 자료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오늘 저녁에 마무리해서 업로드했다. 여기는 작년에 떨어진 적 있는 공공기관이고, 차주 7월 15일쯤 면접 예정이라 마음이 복잡하다.
7월 19일에는 뉴욕으로 가족여행을 간다. 그런데 면접 준비, 지원 서류 작성, PT 작업 등으로 인해 제대로 여행 준비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 주에는 하연 작가님의 과제도 당연히 하지 못했다. 지금도 선생님이 하라고 하시니 이렇게 쓰고 있다.
내일 면접 볼 회사 검색도 아직 못 했다. 이제 시작해야 한다.
'독서 그리고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에세이]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저자(글) · 정문주 번역. 2014 (4) | 2025.06.04 |
|---|---|
| [에세이] 김현아_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0) | 2025.05.17 |
| [취미] 스쿠버 다이빙, 팔라우의 블루 코너, 블루 홀 (2009) (9) | 2024.11.29 |
| 신석정 <들길에 서서> (0) | 2024.11.18 |
| [단편소설] 구두 (1997 년작) (5) | 2024.10.13 |